국제면에 낯선 조어가 하나 등장했다. ‘AI 얄타체제’—2차 대전 후 강대국들이 얄타에서 세계 질서를 그었듯, 이제는 AI를 쥔 나라들이 질서를 다시 긋고 있으며, 심지어 국가 의사결정의 일부까지 AI에 기대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국가의 판단을 기계에 ‘외주’ 주는 게 옳으냐는 논쟁은 이제 시작이지만, 사업하는 사람의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따로 있다. 국가가 저 정도라면 기업은 이미 한참 앞서 있다는 사실이다. 견적을 AI에게 검토시키고, 재고 발주량을 AI에게 물어보고, 채용 서류를 AI가 먼저 거르는 회사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회사마다 성적이 갈린다. 같은 AI를 써도 어떤 회사에서는 귀신같이 맞히고, 어떤 회사에서는 그럴듯한 헛소리를 한다. 차이는 모델이 아니라 재료다. AI의 판단력은 물어보는 회사가 가진 데이터의 질만큼만 나온다. 우리 회사의 원가·재고·거래 이력이 담당자 엑셀과 수첩에 흩어져 있다면, AI에게는 물어볼 재료 자체가 없는 셈이다. AI 시대의 진짜 준비는 최신 모델 구독이 아니라 회사의 숫자가 한곳에 모이는 구조, 즉 ERP 구축에서 시작된다.

AI는 답을 만드는 게 아니라 데이터를 요약한다
AI에 대한 흔한 오해는 ‘똑똑한 직원 하나를 새로 뽑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실제에 가까운 비유는 따로 있다—회사의 기록을 전부 읽고 요약해 주는 초고속 사서다. 사서가 아무리 빨라도 서가가 비어 있으면 내놓을 답이 없다. ‘이번 달 어떤 거래처 마진이 나빠졌지?’라고 물었을 때 AI가 제대로 답하려면, 거래처별 단가와 납품 이력이 어딘가에 데이터로 쌓여 있어야 한다. ‘작년 이맘때 재고를 얼마나 들고 갔지?’에 답하려면 재고 이력이 시스템에 남아 있어야 한다. 데이터가 없는 회사의 AI는 일반론을 말할 수밖에 없고, 일반론은 검색만 해도 나온다. 결국 AI 도입의 성패는 도입 이후가 아니라 도입 이전—회사의 일상 업무가 데이터로 남는 구조를 갖췄느냐에서 이미 갈려 있는 것이다.
우리 회사 AI가 ‘헛똑똑이’가 될 수밖에 없는 신호
- 매출·재고·원가 숫자를 물으면 부서마다 다른 엑셀을 열어 볼 때
- 업무 협의와 결정이 전화와 개인 메신저에만 남아 있을 때
- 현장·매장의 상황이 저녁에 사람 손으로 취합해야 파악될 때
AI에게 물어볼 ‘재료’가 쌓이는 구조 만들기
순서는 분명하다. 먼저 회사의 뼈대 숫자—재고·구매·원가·매출—가 한곳에 모이는 ERP 구축이 기본이다. 여기 쌓인 데이터는 그 자체로 경영 판단의 근거가 되고, 나중에 어떤 AI를 붙이든 가장 좋은 재료가 된다. 숫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일의 기록이다. 협의·결재·일정이 개인 메신저가 아니라 회사 계정에 남는 그룹웨어 구축가 받쳐 주면, ‘그때 왜 그렇게 결정했더라’는 질문에도 시스템이 답할 수 있게 된다. 사무실 밖 데이터도 놓치면 아깝다. 현장 검수든 매장 재고든, 직원이 그 자리에서 입력하는 간단한 웹앱 제작 도구 하나면 종이 서류로 증발하던 데이터가 자산으로 바뀐다. 공통점은 하나—AI가 오기 전에, AI가 읽을 책장을 채워 두는 것이다.
AI 시대의 격차는 좋은 모델을 쓰는 회사와 아닌 회사가 아니라, 물어볼 데이터가 있는 회사와 없는 회사 사이에 생긴다.
국가 의사결정까지 AI가 거드는 시대의 개막을 국제면이 알리고 있다. 흐름을 되돌릴 수 없다면 순서라도 제대로 잡을 일이다—모델은 언제든 갈아탈 수 있지만, 오늘 흘려보낸 우리 회사의 데이터는 다시 쌓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