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면에 실린 소식이지만 실은 모든 사업자를 향한 이야기다. 국내 스타트업 포트래이가 ‘공간전사체’라는 기술로 암 조직의 정밀지도를 그린다. 세포가 무엇인지뿐 아니라 조직 안 어디에 있는지까지 담아 약이 정확한 표적에 닿게 돕는 기술이다. 밑천은 환자 3,000명의 데이터와 1억 2,000만 개가 넘는 세포 공간 지도이고, 그 결과 셀트리온과 약 1,200억 원 규모의 마일스톤 계약, 145억 원의 시리즈B 투자로 이어졌다. 기사에는 또 하나의 사례가 붙어 있다. 깃랩 공동창업자 시드 시브란디가 재발성 골육종 진단을 받은 뒤 자기 종양 데이터를 전 세계에 공개했고, AI 분석으로 이상 단백질을 찾아 맞춤 치료로 완치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다. 두 사례의 교훈은 같다. 승부를 가른 것은 더 똑똑한 AI가 아니라, 쓸 수 있게 정리되어 있던 데이터였다. 그리고 이 원리는 병원 밖에서도 똑같이 작동한다. 회사의 숫자가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쌓이고 있는지—ERP 개발이 유행이 아니라 기초 체력의 문제인 이유다.

AI를 들여도 답이 안 나오는 회사들의 공통점
요즘 AI를 도입해 보겠다는 중소기업이 많지만, 시작하자마자 같은 벽에 부딪힌다. 매출은 회계 프로그램에, 재고는 창고 담당자의 엑셀에, 고객 요청은 메신저 대화방에, 결재 이력은 종이에 남아 있다. 같은 ‘지난달 매출’을 물어도 부서마다 다른 숫자가 나온다. 이런 상태에서는 어떤 AI도 쓸 만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위치 정보가 없는 세포 데이터로는 지도를 그릴 수 없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이치다. 반대로 데이터가 한 곳에 같은 규격으로 쌓여 있는 회사는 AI가 아니어도 이미 이득을 본다. 어느 품목이 언제 돈을 벌어 주는지, 어느 공정에서 시간이 새는지가 월말 결산을 기다리지 않고도 보이기 때문이다. AI는 그 위에 얹는 가속 장치일 뿐, 바닥이 없으면 얹을 데도 없다.
우리 회사 데이터가 ‘지도’가 아니라 ‘조각’이라는 신호
- 같은 질문에 부서마다 다른 숫자를 들고 올 때
- 담당자가 휴가를 가면 진행 상황을 아무도 모를 때
- 월말마다 여러 파일을 취합하는 데 며칠이 걸릴 때
한 번에 다 갈아엎지 않고 시작하는 법
다행히 시작은 회사 전체를 뒤엎는 일이 아니다. 가장 자주 다투는 숫자 하나—재고든 수주든 원가든—부터 한 곳에 모으는 ERP 개발이 현실적인 출발점이다. 여기에 결재와 보고가 사람의 기억이 아니라 기록으로 남게 하는 그룹웨어 개발까지 붙이면, 담당자가 자리를 비워도 회사가 멈추지 않는다. 이미 쓰고 있는 회계 프로그램이나 쇼핑몰, 생산 설비가 있다면 버릴 필요 없이 서로 데이터를 주고받게 이어 주는 SI 구축이 비용 대비 효과가 가장 크다. 핵심은 도구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흩어진 숫자에 ‘자리’를 만들어 주는 일이다. 그 자리가 생기는 순간부터 데이터는 비용이 아니라 자산으로 쌓이기 시작한다.
1억 2,000만 개의 세포도 위치를 알아야 지도가 된다. 회사의 숫자도 자리를 잡아야 자산이 된다.
포트래이가 3,000명분의 데이터를 모으는 데는 몇 해가 걸렸다. 중소기업의 데이터도 하루아침에 쌓이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래서 시작이 이를수록 유리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AI를 언제 도입할지 고민하기 전에, 우리 회사의 숫자가 지금 어디에 흩어져 있는지부터 확인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