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업계에서 5년짜리 장기 공급계약이 ‘뉴노멀’로 굳어지고 있다. 값이 치솟은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두고 엔비디아가 탑재량 축소를 검토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가격도 물량도 예측이 어려운 시장에서 기업들이 찾은 답은 결국 미리 묶어 두는 것이었다. 협상력이 있는 쪽은 5년을 묶고, 없는 쪽은 그때그때 시세로 산다. 이 구도는 반도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불확실할수록 계약 기간이 길어지는 이유
장기계약은 싸게 사려는 전략이 아니다. 오히려 당장은 시세보다 비쌀 수도 있다. 그럼에도 몇 년치를 묶는 이유는 하나다. 계획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내년 원가를 알면 가격을 정할 수 있고, 가격을 정할 수 있으면 영업을 할 수 있다. 반대로 조달이 흔들리면 회사의 모든 계획이 함께 흔들린다. 대기업이 수년치 물량을 선점하는 동안 작은 회사들은 남은 물량을 시세로 사는 구조가 반복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렇다면 협상력이 크지 않은 회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까. 부품 값은 못 정해도, 고객이 우리를 찾아오는 경로만큼은 스스로 정할 수 있다. 어려운 시기에 버티는 회사들의 공통점은 원가가 유난히 낮은 것이 아니라 매출이 어디서 들어오는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고정해 둘 수 있는 세 가지
- 문의와 주문이 도착하는 자리: 플랫폼과 오픈마켓, SNS는 수수료와 노출 정책이 언제든 바뀐다. 반면 자사 사이트의 규칙은 바뀌지 않는다. 홈페이지 개발을 일회성 비용이 아니라 몇 년짜리 계약처럼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파는 자리: 상세 설명과 결제 흐름이 우리 손에 있으면 가격·구성·프로모션을 그날 바꿀 수 있다. 외부 채널에만 의존하면 이 조정이 늘 한 박자 늦는다. 쇼핑몰 개발은 결국 이 조정 속도를 확보하는 일이다.
- 다시 부를 수 있는 수단: 한 번 산 고객에게 다시 닿을 방법이 없으면 매번 새 고객을 돈으로 사야 한다. 재구매가 잦은 업종일수록 주문 이력과 알림이 남는 어플제작 쪽으로 눈을 돌리는 것도 그래서다.
‘싸게 사기’보다 ‘흔들리지 않기’
메모리 탑재량을 줄이는 검토조차 같은 문제의식에서 나온다. 성능을 조금 양보하더라도 원가 구조를 예측 가능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회사 규모와 무관하게 적용되는 원칙이다. 매달 나가는 광고비가 매출을 만드는 유일한 통로라면, 그것은 장기계약이 아니라 매일 시세로 사는 구조에 가깝다. 광고를 멈추는 순간 매출도 함께 멈춘다면 그 채널은 자산이 아니라 임대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걱정하는 대신, 통제할 수 있는 것부터 계약처럼 묶어 둔다.
시장은 앞으로도 흔들릴 것이다. 메모리 값이 오르내리고 환율이 움직이고 플랫폼 정책이 또 바뀔 것이다. 그 사이에서 회사가 붙잡을 수 있는 고정점은 의외로 소박하다. 우리를 찾아오는 주소 하나, 파는 화면 하나, 다시 부를 수단 하나. 몇 년을 버티는 구조는 대개 이 세 가지에서 시작된다.